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슈바이처 (문단 편집) === 세계 대전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억류된다. 랑바레네가 프랑스령이었기 때문에, 독일 국적인 그는 자연스럽게 적국 국민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의 사상인 생명 외경의 윤리는 이 시기에 다듬어지게 된다. '인간이란 살려고 하는 생명, 또한 생명에 둘러싸여 살려고 하는 생명'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실천 윤리학의 창안이 그의 목표였다고 한다. 그리고 1917년 그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고향인 알자스 지방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어머니가 프랑스 병사들의 말에 깔려 사망하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어머니의 죽음도 의료 봉사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강연과 연주회 및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출판으로 다시금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 병원 재건과 운영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데 열을 쏟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알자스가 프랑스로 편입되어 국적을 [[프랑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자,[* 1차대전 후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 주민들 중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자였던 사람과 그 자손에게 프랑스 국적 취득을 허용했다. 슈바이처의 경우 부모가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자였기 때문에 프랑스 국적 취득이 가능했다.] 그는 랑바레네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국적을 프랑스로 바꾼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고생을 했지만 연합군, 추축군 모두 그의 [[병원]]을 보호하려고 했으므로 무사했다. 이후 [[냉전]] 시대에서도[* 슈바이처의 국가인 프랑스는 자유주의 국가다.] 미군과 소련군도 그의 병원을 보호하려고 했다. 1924년에 다시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부터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로 불리며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1928년에는 괴테상을 수상하였다. 이때부터는 슈바이처를 존경하는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 수의사들도 아프리카로 건너와 병원 규모를 더 늘릴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